리뷰와 소개

[책] 보이는 어둠

웅쓰띵킹 2023. 9. 1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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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윌리엄 스타이런

번역가 : 임옥희

발행일 : 1990년

페이지 : 84p

특징 : 거의 대부분의 온오프라인 서점 품절


 

내용

- 『보이는 어둠(Darkness Visible)』(1990)은 영화 <소피의 선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윌리엄 스타이런이 경험한 우울증에 대한 솔직하고 통렬한 보고서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던 저자는 1985년 가을 극심한 우울증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통과하게 된 수많은 감정의 터널과, 그것을 극복하기까지를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시골 동네 전화국이 홍수에 잠겨드는 것처럼” 가라앉기 시작한 자신을 바라보며 느껴야 했던 절망, 또 그것과의 사투, 결국 “절망을 넘어선 절망이자 언어 너머에 있는 어둠”을 바로 보게 되기까지의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내용 한줄

-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모든 형태의 상실감은 우울증의 시금석이다. 이 병의 진행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 또 퇴행하여 나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매 단계 상실감을 경험했음을 알게 되었다. p68

-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거의 언제나 구출된다. 극히 심각한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비현실적인 절망 상태에서 과장된 병마와 치명적인 위험으로 인해 갈가리 찢기고 분열된다. 친구, 사랑하는 사람, 가족,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에게 생명의 가치는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런 헌신은 무수히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p93

- 그래서 우리는 빠져나왔도다. 다시 한번 별을 보게 되었노라 p103

- 로맹가리는 카뮈가 깊은 절망 상태에서 종종 자살을 언급하곤 했다고 귀뜸해주었다. 때로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로맹가리를 상심하게 할 만큼 그 농담 속에 뼈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자살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변에 깔려있는 멜랑꼴리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의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시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p29

- 중증의 우울증 상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제2의 자아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2의 자아는 일종의 유령 같은 관찰자로서, 본래 자아가 경험하는 치매상태가 전혀 없는 냉정한 호기심을 갖고, 그가 다가오는 재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혹은 어떻게 무너지고 마는지 관찰한다. 이 모든 해우이에는 연극적인 요소가 있다. 그 후 며칠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소멸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 상황이 멜로드라마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으며, 고독한 배우인 동시에 외로운 관객이었다. 나는 아직 어떤 방법으로 세상과 이별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단계가 다가오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조만간, 마치 다가오는 저녁을 피할 수 없듯이 필연적으로 다가오리라는 것을. p78

- 병원은 갑작스런 안정감이라는 기이하고 만족스런 충격을 주었다. 가정이라는 너무도 익숙한,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무질서한 환경으로부터 이송되어 질서정연하고 양호한 연금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이게 진짜 치료사는 격리와 시간이었다. p84

- 우울증의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자살이야말로 사실상 유일한 치료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울증이 영혼의 절멸은 아니라고 강조하거나 아니면 고무적인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병에서 회복되었던 사람이야말로 무수히 많을 터인데 은총을 입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p102

- 병원에서 병세가 회복되기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처음으로-진지한 관심을 갖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내가 왜 이런 재앙에 시달리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우울증에 관한 정신과 문헌은 방대할 뿐만 아니라 병의 원인에 관한 이론은, 온갖 이론이 줄을 이어, 공룡의 멸종이나 블랙홀의 기원에 관한 이론만큼이나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 가설의 숫자가 엄청난 것은 역설적으로 이 질병의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입증하는 것이다. 시발점이 되는 메커니즘의 측며에서-내가 명시적인 위기라고 이름한-느닷없이 술을 끊게 된 것이야말로 내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 시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 밖의 다른 가능성은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어 암울한 사실, 즉 이즈음 나는 막 예순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심한 타격을 입었으며, 그로 인해 인간으로서 폐기 처분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내 작품이 진행되는 방식에 막연한 불만-작가로서 평생을 보내는 동안 끊임없이 사로잡혔던 무기력의 습격-을 느끼지는 않았던가? 그로 인해 상처받고 화가 났던가? 다른 어느 때보다 이런 가능성들이 보다 격심하게 나를 괴롭혔으며, 술을 마시지 못해 이 모든 문제들이 더욱 증폭되었던가? 아마도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이리라.

이 모든 이유들에 비해 이 병의 근원을 보다 이전 시기에서 찾는 것이 내겐 더 의미 있다. 우울증이 진행되다가 결국 광기로 만개하는 것을 설명해줄 망각되고 매몰된 사건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병이 맹렬한 공습을 가하다가 대단원으로 막을 내리기 전까지는 내 작품을 무의식과 관련시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이것은 문학 비평에서 탐구해보아야 할 영역이다). 건강을 다시 회고한 뒤, 내가 처했던 시련과 관련시켜 과거를 성찰해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수년 동안 우울증이 언제나 내 삶의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내 소설에서 자살은 언제나 등장하는 주제였다. 내 작품의 주인공 중에서 세 명이 자살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내 소설의 시퀀스-내 작품의 여주인공들이 파국을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길-를 다시 읽어보면서, 젊은 여성의 내면에 초래된 우울증의 풍경을 어쩌면 그토록 정확하게 그려냈는지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서장애와, 그 주인공들을 파괴로 이끄는 정신적인 불균형과 이미 혼란스러워진 무의식을 본능이라고 할 수 잇는 감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에게 다가온 우울증은 사실상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전적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도 아니었다. 우울증은 몇심 년 동안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p7 ~ p94


21년부터 23년까지 두 곳의 병원에서 3년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3월 쯤부터 회복된 줄만 알았는데 최근 꿈과 현실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기분나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보이는 어둠]을 통해 회복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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